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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여동생 기일에..

by 기쁨의 뜨락 2012. 1. 15.
    어제는 9년 전 갑자기 심장마비로 하늘나라로 간 제 여동생 기일이었습니다 골육종이란 암을 선고받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속에서 얼마나 많은 날들을 힘들어 했는지.. 발병당시 자식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아들8살, 딸7살) 남편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저는 지금 죽어도 괜찮으나 저 어린 자식들이 너무 불쌍하니 딱 10년만 더 살게해 달라고.. 다행히 다리 하나는 절단했지만 생명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심성이 착한 동생은 그후 착하고 아름답게, 봉사도 하며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족을 끼고 살면서도 구김살 없이 해맑은 웃음을 간직하며 늘 주위사람들을 감동시켰으니까요.. 하늘나라로 가던 해가 기도로 간구한지 딱 1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시기도 하시지만 또 정말로 두려운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아래의 글은 동생이 하늘나라로 가기 두달 전에 쓴 글입니다 지금은 아픔도 고통도 없는 천국에서 환하게 웃으며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주님! 당신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게되고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더 깊은 통회의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일아침인 오늘도 제 자신이 하나님의 품에 안겨 가벼운 마음으로 흥얼거릴 수 있는 힘은 단 한가지, 당신을 제 마음속 깊이 모실 수 있는 기쁜 마음 때문입니다. 지난 2월 11일은 제가 다시 태어난지 만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형선고처럼 들렸던 병명 골육종은 아무 믿음도 없던 당신의 젊은 딸이 갑자기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큰 충격이었고, 주위 분들이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주었지만 그 모든 소리는 귀에도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넋이 나간 채로 그날 당장 소견서를 가지고 전문 암센터인 원자력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암담했던 순간에도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10년이 다 지난 지금 생각해도 그건 주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이었고, 아무 사고없이 병원까지 갈 수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이 믿을 수 없어 오진일거라며 현실을 더 많이 거부하였고 너무도 억울하여 세상도 주님도 모든게 다 원망뿐이었습니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오진을 의심할수록 그 모든 건 자신을 감추기 위한 나의 위로에 불과했고 하루하루 제 자신의 몸과 마음은 산산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갔으며 그런 저를 질질 끌다시피 끌어내어 일상의 계획대로 꿰어 맞춰 나가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거의 성가시고 귀찮게만 여겨졌던 일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건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이 타지에서 끊임없는 기도와 위로를 주고 가시는 저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그들의 사랑은 한 점 꾸밈이 없었기에 제 마음은 차츰차츰 차분히 현실을 받아들이며 "내가 무엇이길래 형제 자매님들, 믿음의 식구들이 날 위해서 자꾸만 자꾸만 오시는가?" 깊이 생각했습니다. 주님께 원망했던 모든 마음이 죄스러움으로 다가왔고 저분들은 저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들이라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했던 당시에도 남편과 둘이서 하나님을 부여잡고 매달렸으며 저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실 하나님이 항상 제 곁에 계신다는 용기가 생기면서부터는 매일매일 더 열심히 서로의 슬픔까지도 다독이며 애절한 기도로 사랑의 응답을 갈망했습니다. 갈수록 모든 것이 약해져만 갔고 나 자신도 모르게 짜증, 투정, 갈등, 고통..등등의 참기 어려운 나날이었지만 그분은 항상 제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지켜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실감하고 믿으면서도 그 당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너무도 컸기에 감사드리기보다는 보이는 부분에 대한 아픔만 다시 한탄했고, 정신적 기복도 너무나 심해 힘든 치료과정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터널인 최악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혈구 수치가 최저로 떨어져 응급으로 무균실에 실려가고 있었고 그 때는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움직임도 모든 게 내 의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보호자도 없는 투명 비닐 속 무균실에서의 시간은 그전의 시간보다 더 고통스럽고 외롭고 무서운 현실이었는데도 마음에 큰 평화가 찾아왔고 모든 걸 주님께 다 맡긴 채로 그 어느 것도 두려움 없이 그분을 뵐 수 있었습니다. 꿈도 현실도 아닌 상황에서 형상으로 보여 주신 그 분은 가여운 당신의 딸을 죽음의 유혹으로부터 아무 말 없이 사랑으로 지켜 주시고 계셨습니다. 한동안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던 그분이, 저에게 가득한 사랑의 응답을 보여주셨고 퇴윈후 예배에 처음으로 참석한 그때, 그 감격과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 시간내내 흐르는 그 감사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른 뒤엔 내 현실과 다시 태어난 내 몸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 내 자신을 자꾸 또 괴롭혔습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유혹과 너무도 힘든 나날로 내 마음을 이기지 못하며 지낸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까지 믿고 기다려준 내 가족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때늦은 회개가 밀려왔습니다. 나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가슴 졸이며 기다려 온 가족들인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께 맡긴 채로 무균실에서 만나 뵐 수 있었던 그 주님을 떠올리며 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위해 묵상하였고 그 묵상이 잦아지면서 그분의 말씀은 텅 빈 내 마음을 조금씩 채워주셨으며 그분이 주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 한가지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주님 주신 생명이 아직 내 안에 가득한데 성령의 이끄심으로 지금 이대로의 삶에 순응하는게 내 최선의 영성생활임을 알 게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을 그리며 더 많은 참회의 삶을 살아가고 최선을 다해 내 가정에 봉사하며 부모형제의 사랑담긴 마음을 따뜻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로 돌아가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 힘들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온 뒤에서야 내 마음에 진정한 참 평화가 다시 찾아왔고 그 평화와 사랑은 모두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믿고 따르던 남편이, 항상 제 옆을 묵묵히 잘 지켜주었기에 고통의 시간들을 부활의 기쁨으로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특별히 선택해 주신 나 자신이었기에 지금은 너무도 소중하고 힘든 시간동안 저를 사랑으로 감싸주신 모든 분들께 죽는 그 날까지 어찌 그 고마움을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닥친다해도 주님의 크신 은총속에서 그분이 주신 믿음과 용기로 밝고 힘차게 살아 나가는 길이 곧 고마운분들께 드리는 보답이라 여깁니다. 많은 회개와 속죄 속에서 저보다도 못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던 제 자신과의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은 채 저에게 덤으로 주신 지난 10년의 삶이 당신 앞에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 사순 기간동안 더 많은 회개로 주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깊이 반성하고 욕심과 세상에 맛들여져있는 마음속 구석구석을 다 털어 내어, 그때 그 고통속에서 거짓없는 마음으로 아버지와 약속했던 사랑의 삶을 살아가리라 다시한번 약속하며 주님이 주시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라고 여기시도록 지금보다 더 아버지 가까이에 갈 수 있는 당신의 작은딸이 되고자 합니다. 주님! 당신의 크신 은총 속에서 저와 저희 가정을 지킬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002년 3월 3일에, 故人이 된 김영주가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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